오랑캐 홍타이지, 우리가 잊고 지낸 한반도 정복자

조선을 정복한 오랑캐, 청 태종 홍타이지와 만주족의 굴기를 다시 생각한다

“비문의 굴욕적인 내용 때문에 1895년 고종은 삼전도비를 땅속에 묻게 했으나 1913년에 일제가 다시 세웠고 1958년에는 당시 문교부의 주도하에 땅속에 다시 묻는 등 비석의 수난은 이어졌다. 1968년 홍수로 비석의 모습이 드러난 후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서울 잠실의 삼전도비 앞에 세워진 안내문의 일부이다. 우리 역사에서 1637년 1월 조선의 왕이 오랑캐 황제에게 무릎을 꿇은 사건은 땅속에 묻어버리고 싶을 만큼 아픈 대목이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굴복시킨 만주족은 곧이어 중국을 정복하고 세계 최강의 제국 대청 시대를 열었다. 만주족 성공의 비결은 굳센 의지와 실력이 있다면 작은 나라도 능히 대국에 맞설 수 있다는 오랑캐 전략에서 찾을 수 있다. 17세기 초 만주족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족속의 명운을 걸고 대륙 정복의 길에 나서기로 결단하였다.



같은 오랑캐였지만 순이(順夷)였던 조선과 180도 다른 꿈을 키웠던 역이(逆夷), 만주족의 결단은 오늘의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된다. 그런데 만주족이 견지한 오랑캐 정신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용략이 뛰어난 지도자의 선구자적 역할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 지도자가 청 태종 홍타이지(1592~1643)이다.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들판에서 조선 왕을 무릎 꿇렸다. 그 결과 홍타이지는 ‘한반도 정복자’라는, 우리 역사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인물로 스스로 자리매김하였다.

홍타이지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용맹과 지략을 동시에 갖춘 쾌남아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완전히 새롭고 더욱 큰 것’으로 키워내는 2세 경영의 힘, 창업주를 능가하는 창업정신도 배울 수 있다. 홍타이지를, 17세기 만주족 이야기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그러나 홍타이지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은 희미하다. 누르하치나 칭기즈칸은 잘 아는 한국인들이 홍타이지를 망각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땅을 직접 밟는 등 누르하치나 칭기즈칸보다 우리 역사에 훨씬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인데도 말이다.

조선은 병자호란 때 한 번 망한 셈이다. 전광석화 같은 만주군의 공격에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했다가 결국은 무릎을 꿇었다. 오랑캐라고 얕봤던 족속에게 짓밟혔다면, 그래서 수백 년간 부끄러워했다면 조선의 조야는 실패 원인부터 스스로의 약점까지 철저히 분석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다. 편하게 망각하고 숨기는 길을 택했다.

40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만큼 병자호란의 굴욕을 제어할 수 있는 심적 여유가 생겼다. ‘오랑캐에게 항복했다’는 상처도 아득한 옛 기억일 뿐이다. 이제라도 홍타이지와 만주족이 조선을 침공한 배경, 당대 동아시아의 국력 동학(動學)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필요성이 있지 않을까? 홍타이지와 만주족이라는 거울에 비친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직시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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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안용복

안용복/도서출판 산수야/권오단/12,000원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역사소설

2011년, 일본은 모든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독도를 ‘일본 고유의 영토’로 명기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역사적으로 독도는 대한민국의 주권 회복의 상징이었다. 독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과 함께 되찾은 우리의 땅이며, 일본의 일그러진 침략주의를 상징하는 섬이다. 지금 일본이 독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자국의 침략주의와 자신들이 저질렀던 식민지 범죄의 역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독도는 또한 경제적으로 큰 가치가 있는 섬이다. 일본과 대한민국 사이에 위치한 독도는 예전부터 배타적 경제수역의 문제 한가운데에 있었다. 국제법상 배타적 경제수역이란 자국 연안으로부터 200해리까지의 모든 자원에 대해 독점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수역을 뜻한다. 독도로 인해 대한민국 바다의 영토가 넓어지는 것이다. 일본은 독도의 풍부한 어류자원과 막대한 지하자원을 빼앗기 위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 자료와 일본 내부에서 발견되는 지도에서조차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증거가 명확하게 발견되고 있지만, 일본은 역사적·경제적 가치 때문에 독도에 대한 미련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일본 학생들이 여과없이 독도를 자국의 영토라고 배우며 자라날 것을 생각하면, 자국의 부끄러운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도 없는 일본의 행태가 어처구니없고 놀라울 따름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의 현실은 당시와 너무도 흡사하게 닮아있는 듯하다. 독도에 대한 일본의 야욕과 도발은 과거 대마도주가 그랬던 것처럼 시간과 세대를 초월하여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일본이 조직적으로 감행하고 있는 독도와 동해 명칭에 대한 도발에 대항하는 이들은 또한 유감스럽게도 정부가 아닌 제2, 제3의 안용복들이다. 그들은 과거의 안용복과 그 동료들이 그랬던 것처럼 동해바다 끝머리에 외롭게 남겨진 섬 독도를 지키기 위해 끈질긴 투쟁을 하고 있다.

이 책은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땅을 사랑한 민초들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다. 안용복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힘없고 평범한 민초일 뿐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 이 땅을 사랑한 뜨거운 가슴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안용복과 독도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있었지만 그의 생애나 삶의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때문에 소설이라는 장르를 빌어 그의 삶의 행적을 따라가보았다. 도해 이후에 안용복 일행이 돌아와 양양 현에 갇히고, 안용복이 동래현까지 내려갔다가 사로잡혀 의금부에서 국문을 당하는 암울한 이야기는 쓰지 않았다. 이 땅을 사랑했던 민초들의 자랑스러운 행적을 암울한 정치사의 덧칠로 폄하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작가 서문 중에서 –

안용복은 어떤 인물인가?

『성호사설』에는 동래부 수군에 예속된 전함의 노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왜관에 자주 드나들어 일본말을 익혔으며, 1693년(숙종 19년)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 어민이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박어둔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받았으나 귀국 도중 대마도에서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겼다. 같은 해 9월 대마도주는 예조에 서계를 보내 울릉도(일본명―다케시마竹島)에서 조선 어민의 고기잡이를 금지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외딴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요청한 예조복서(禮曹覆書)를 보냈다.

1696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다시 일본 어선을 발견하고 독도(일본명―마쓰시마松島)까지 추격하여 영토 침입을 꾸짖었으며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칭하고 백기도주로부터 영토 침입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후 사사로이 국제 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영의정 남구만의 도움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1697년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역사소설 안용복

안용복의 도해(渡海)는 대마도주의 오랜 흉계를 세상에 드러낸 하나의 사건이었다. 첫 번째 도해 때 대마도주는 안용복이 막부로부터 받아온 문서를 압수하였고, 외교적으로 노련한 다다 요자에몽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몇 차례 협상 끝에 외교 분쟁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일본은 1696년 1월 28일 막부의 중신인 네 명의 로주들이 서명하여 울릉도와 자산도 도해를 금지하는 봉서를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의 어로 행위가 그치지 않자 안용복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다시금 도해를 결심하게 된다.

태종 13년1407 3월 15일 대마도 수호(守護 종정무宗貞茂, 소오 사다시게)가 평도전(平道全, 히라미치 젠)을 보내와 토물(土物)을 바치고, 잡혀갔던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이때 종정무가 울릉도에 여러 부락을 거느리고 가서 옮겨 살고자 한다는 청을 하였다.

이는『조선왕조실록』에 전하는 독도 관련 자료이다.

히라미치 젠은 태종의 호위무사로서 오랫동안 대마도주 소오 사다시게의 밀정 노릇을 하다가, 세종 1년1419년 대마도 정벌 때 죄가 발각되어 귀양을 간 인물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일본의 노력은 조선이 개국한 이후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정치·문화·군사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던 조선 초기에는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 영토로 단호히 선포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울릉도와 독도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왜인들은 두 섬의 이름을 다케시마와 마쓰시마로 부르며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 했다. 안용복의 도해는 이러한 왜인들의 오랜 흉계를 세상에 드러낸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1693년 일본 어부들에게 납치되다시피 끌려간 안용복은 에도 막부가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와 독도 도해를 금지한 문서를 요나고 번주로부터 받았지만,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주에게 압수당하고 말았다. 대마도주는 외교적으로 노련한 다다 요자에몽(橘眞重)을 파견하여 울릉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하여 몇 차례의 협상 끝에 외교 분쟁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섬의 소유권을 놓고 전쟁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1696년 1월 28일, 막부의 중신인 네 명의 로주(老中막부 및 번에서 정사를 돌보는 직책)들이 서명하여 울릉도와 독도 도해를 금지하는 봉서를 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릉도와 독도에서 일본 어부들의 어로 행위가 그치지 않자 안용복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금 도해를 결심한다.

1693년의 첫 번째 도해가 일본 어부들에게 끌려간 형태라면, 1696년의 두 번째 도해는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스스로 찾아간 것이다.

안용복의 두 차례 도해로 말미암아 조선 조정은 외교적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소유권을 분명히 했다. 이듬해 일본 막부는 울릉도 근처의 출어를 금지하겠다는 사실을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 측에 공식적으로 통보하였고, 이로써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분쟁은 종결되었다.


안용복

안용복

권오단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을 되찾아온 어부 안용복의 삶을 다룬 역사소설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단골 외교 분쟁거리가 되어 왔다. 일본은 독도가 가진 여러가지 이점을 인식하고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해 왔다. 풍부한 어류자원과 막대한 지하자원을 빼앗기 위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고,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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