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v 202019
 

이번 주 토요일 오후 2시, 통영시 봉평동 통영 도서관에서 [삼도수군통제영] 장한식 저자를 만납니다. 장한식 저자는 통영 출신으로 그동안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를 비롯해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삼도수군통제영]을 출간하였습니다.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와 [삼도수군통제영]을 쓴 장한식 저자는 조선후기 3백 년 동안 조선의 바다와 해변을 호령한 무게중심이 ‘삼도수군통제영’이라고 말합니다. 서울의 연구자들이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에 통제영이 수행한 시대적 역할과 파급력이 크고도 깊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남해의 작은 항구 도시, 통영에는 풍성한 역사와 문화 이야기가 넘쳐 납니다.

아름다운 바다에 켜켜이 다져진 통제영의 역사가 진짜 통영의 모습입니다. 통영을 제대로 여행하고 이해하려면 이순신과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시작된 통영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통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삼도수군통제영을 복원하고 자신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중입니다. 그 과정의 하나로 통영시 봉평동에 있는 통영도서관에서 11월에 삼도수군통제영을 재발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통영을 깊고 넓게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여서 기대됩니다.

장한식 저자가 글을 다루는 솜씨는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가 출간했던 책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통영 출신인 장한식 저자가 공식적으로 통영 공공장소에서 통영 독자를 만나는 건 처음입니다. 기대와 설렘으로 11월 23일 토요일 오후 2시를 기다립니다.


Nov 152018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 포구에 위치한 통영은 지방 도시 이상의 무게를 지녔다. 통영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삼도수군통제영 덕분이다. 수군통제영과 그곳을 다스렸던 통제사들은 조선인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연구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 통영에 위치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수행한 시대적 역할과 파급력은 크고도 깊었다. 그랬기에 지금은 한적한 관광도시, 수산도시에 불과한 통영이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풍성한 사연들이 넘쳐나도록 담겨 있다. 산수야 출판사에서 출간한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은 지금껏 소홀히 다뤄졌던 통제영의 역사적 중량을 복원하고 주변부에 머물렀던 통영과 해양의 중요성을 재조명한다.

남해바닷가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생긴 계기는 조일전쟁(임진왜란)이었다. 대전란을 경험한 이후 조선왕조는 생존본능에서 삼도수군통제영이란 계획도시를 건설하였고, 일본의 재침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한 군영체제를 오랫동안 유지하였다. 물산이 풍부한 해변에 많은 군력이 집중되면서 통제영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큰 비중을 갖게 되었고, 역으로 한양의 중앙정치에까지 실질적 파워를 투사할 수 있었다. 300년 통제영 역사에는 208대에 이르는 삼도수군통제사들의 풍성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기도 하다. 이 책은 ‘바다를 버린 나라’ 조선에서 해양문화의 창(窓)이자 요람으로 기능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와 문화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새롭게 조명하고 굴절됐던 한반도 해양문화의 회복을 시도하며 갯내음 물씬 풍기는 통영의 역사에 독자들을 초대한다.

통제영, 잠든 조선의 해양 문화를 깨우다

중세 이후의 세계사는 바다를 활용하는 능력이 각국의 운명을 갈랐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처음에는 동양이 앞서 나갔다. 중국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시절이던 1406년부터 7차례에 걸쳐 정화가 이끄는 3만 명의 함대로 동남아와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대항해의 역사를 썼다. 유럽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 보다 먼저 ‘지리상의 발견’에 나선 셈이다. 이 때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중국은 기왕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더욱 강화하며 바다를 멀리했다. 그 결과 세계 최선진국, 최강국이던 중국의 국력은 점차 서구에 뒤처지게 된다. 조선조의 해양사도 중국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왕조 개창 이후 바닷길을 꽁꽁 걸어 잠갔고 그 결과 고려시대까지 꽃피웠던 한반도의 해양문화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서양의 근현대사는 바다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탈리아 북부에 자리잡았던 해상의 도시국가 베니치아가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5세기 이후, 베네치아 주민들은 훈족이 침략할 수 없는 갯벌에 말뚝을 박아 건물을 올리는 방식으로 도시를 건설하고서는 아드리아해는 물론이고 전(全) 지중해 세계를 석권했다. 베네치아인들이 이룩한 해상경영의 노하우는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전수됐고, 15세기 들어 유럽 각국은 앞다퉈 신대륙을 발견하고 식민지를 확대해 나갔다. 이후의 근세사는 해양화를 먼저 이룬 서양(유럽과 미국)이 육지에 갇혀 지낸 동양과 여타 지역을 리드해온 역사였다. 반면 일본은 바다를 대하는 자세가 한국.중국과 달랐다. 조선왕조가 섬나라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첫째 원인도 바닷길을 막고 국부민강(國富民强)의 길을 스스로 차단한 데서 찾아야 한다. 다만 남해바닷가에 통제영이란 작은 창(窓)이 열려 있었기에 조선의 해양문화는 완전질식을 피할 수 있었다.

수국(水國)과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물 위에 뜬 나라’가 있었다. 한반도에 역사가 생겨난 이후 가장 엄혹했던 시절, 버려진 해변과 섬, 바다 위로 쫓겨난 백성들로서 이룩한, 작지만 굳센 공동체였다. 조선국 안의 또 다른 나라, 가칭하여 ‘수국(水國)’이었다. 조일전쟁(임진왜란)이라는 일대 혼란기에 불꽃처럼 생겨났다가 종전과 함께 왕조체제 안으로 녹아들어간 ‘군·산·정(軍·産·政)복합체’가 곧 수국이다.
수국을 세운 사람은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바다를 버린 왕국’ 조선에 해양의 가치를 일깨워 주었다. 그가 세우고 아꼈던 ‘물나라, 수국’은 종전 이후 삼도수군통제영으로 계승되며 우리 해양문화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었고, 훗날 식민지로 조락했던 그의 조국이 해양강국으로 재기하는데 있어 정신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저자는 이순신과 수국에 관련된 내용을 저자의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책에 자세히 소개했다.)

삼도수군통제영 3백년 역사의 기록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은 저자가 2009년에 발간한 <이순신 수국(水國) 프로젝트>의 후속편인 셈이다.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는 1592년 조일전쟁이 발발하고 이듬해 충무공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후 ‘한산도(정유재란 시기에는 고금도) 통제영’을 중심으로 서남해 일대의 많은 섬과 해변에 나라에 비견할 만한 수국(水國)체제를 구축해 일본군과 대결했다는 ‘분석적 사실(史實)’을 기록한 책이다. 위 책은 조일전쟁 시기 이순신의 활약상을 주로 다뤘던 만큼 이순신 사후(死後) 삼도수군통제영 체제의 형성과 발전의 역사는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통제영 3백년사에 대한 기록이 미흡했다는 아쉬움에서 저자가 9년의 세월이 지나 다시 꾸민 책이 <바다 지킨 용(龍)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이 책은 전문연구서가 아니고 통영의 근세사를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볼 수 있게 꾸민 대중도서이다. 저자는 수백 년 전 조선왕조가 남해바닷가 외진 포구에 강력한 군진을 설치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렇게 생겨난 군영체제가 역으로 조선인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출판사 서평

조선 후기 3백여 년 동안 조선의 바다와 해변을 호령한 ‘무게중심’은 삼도수군통제영이었다. 서울의 연구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 통제영이 수행한 시대적 역할과 그 파급력은 크고도 깊었다. 그랬기에 지금은 한적한 관광도시, 수산도시에 불과한 통영이지만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풍성한 사연들이 넘쳐나도록 담겨 있다.
사실 외양만 놓고 본다면 통영이라고 해서 특별한 감동이 있을 수 없다. 흔해 빠진 항구도시, 풍광을 조금 갖춘 해변소도시일 뿐이다. 그러나 통영은 두터운 역사를 깔고 앉은 도시이다. 통제영 역사라는 내면의 실체를 살펴야 통영 땅과 바다의 진면목을 알고 그 가치를 제대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삼도수군통제영은 통영시의 본질이요 통영관광의 핵심이다. 통영의 관광명소 가운데 통제영 시대의 전통과 문화가 녹아 있지 않은 곳은 없다. 통영 땅의 본질과 핵심을 제대로 체험하는, 이른바 ‘인문학적 여행’을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면 통영시내 문화동에 위치한 삼도수군통제영 옛터를 먼저 둘러보고 그 역사부터 공부해야 한다. 삼도수군통제영을 알지 못하고 통영시를 관광한다는 것은 수박의 속을 버려두고 겉만 핥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은 독자가 통영을 제대로 여행하고 즐기게 하는 길잡이 책이다.

본문 중에서

용을 닮은 땅 두룡포(頭龍浦)… ‘우두머리 용의 포구’에 바다를 지키는 용들이 넘쳐났으니 통영은 ‘용의 도시’가 분명하였다. 중앙권력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해변에서 왕처럼 군림하였던 ‘두룡포의 주인’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는 해왕(海王), 또는 용왕(龍王)에 비견될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였고 서울의 궁궐을 제외하고는 조선팔도 어떤 도시보다 웅장한 100여 동의 관아건물군을 자랑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은 용궁(龍宮)에 비유할 만하였다. 10-11페이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은 ‘삼도수군통제사의 군영(軍營)’을 뜻하는 만큼 통제영의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통제사(統制使)란 직책이 설치된 경위부터 살펴야 한다. 경상전라충청, 삼도(三道)의 수군을 통할하는 관직인 통제사가 첫 등장하기는 조일전쟁(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음력 8월의 일이다. 1592년부터 7년간 지속된 조일전쟁의 시말(始末)은 수없이 다뤄져 식상할 정도지만 통제영이 출현하게 된 시대배경이란 점에서, 수군의 활약상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망해 볼 필요성이 있다. 40페이지

유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적들은 수륙 양면으로 군사를 합쳐 서쪽을 치려했으나 이 싸움으로 그들의 위세가 크게 꺾였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이 평양을 얻었으나 형세가 외로워 더 진격하지 못했다. 우리나라가 보존된 것은 오로지 이(한산대첩) 때문이었다.”라고 적었다. 67페이지

흔히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와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은 동시에 생겨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통제사가 머무르는 군영이 곧 통제영이라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통제사란 직책은 생겼지만 제도적 의미의 통제영은 한동안 건설되지 않았다. 80페이지

두룡포 동쪽 견내량 수로의 중요성은 조일전쟁 때 입증됐다. 이순신이 견내량을 틀어쥐고 있는 동안 일본 해군은 거제도 서쪽을 넘보지 못했으니 이곳이야말로 해상의 문경새재였던 것이다. 두룡포 서쪽에 위치한 착량(鑿梁)은 통영 시내와 미륵도 사이를 가로지르는 통영운하의 옛말이다. 조일전쟁 이전까지 이곳은 밀물에는 바닷물이 통하고 썰물이 되면 육지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여울목이었다. 103페이지

봄철… 통제영 앞 바다에 삼남의 수군과 전선들이 총집결해서 일자진과 장사진, 학익진 등 각종 진형을 형성하며 가상의 일본 해군과 모의전투를 치르는 대형 전투훈련 장면은 참으로 볼만했다고 한다. 전선에서 발사한 대포소리는 내륙 깊숙이 울려 퍼지며 수군의 존재를 백성들에게 각인시켜 주었을 것이다. 119페이지

삼도 연해의 군권과 행정권, 사법권, 조세징수권 등 각종 권력이 통제사에게 집중돼 있었다. 통제사가 군권 외에 각종 권한을 확보한 것은 해방을 위해 삼남의 해변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도록 힘을 몰아준 조정의 의지가 반영된 때문이었다. 체제 생존의 방편이었음은 물론이다. 그 결과 통제사는 삼도 해민(海民)들의 생살여탈권을 쥔 해왕(海王)이나 다름없었고 통제영은 ‘해상의 총독부’에 비유할 권력을 지니게 되었다. 136페이지

통제영에서 통제사직을 실제로 수행했던 역대 삼도수군통제사들의 경력과 집안 내력 등을 기술한 책으로는 ‘한산도선생안(閑山島先生案)’이 있다(선생안이란 전임 관원의 이름과 본관, 생년월일, 재임기간 등을 기록한 책을 말한다). 이 선생안에 이름이 오른 인물만을 정식 통제사로 인정한다. 145페이지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창건한 통제영이었지만 1895년 폐영 때까지 조일전쟁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통제영은 일본군의 재침 방지를 위한 역할은 100% 완수했지만, 전란이 없었기에 그 가치를 입증하지는 못한 셈이다. ‘제2의 충무공’을 꿈꾼 통제사들 역시 전공을 세울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통제영 300년이 결코 무의미한 시기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 해양사(海洋史)에 큰 보람을 가져다준 기간이라 말할 수 있다. 318페이지

우리나라가 동해의 두 섬 울릉도‧독도와 그 주변 바다를 확보하고 있는데 따른 이득은 작지 않다. 어업상의 혜택은 물론이고 장차 천연가스를 비롯한 각종 자원을 점유하게 된다는 의미도 크다. 또 일본이나 러시아와 같은 외부세력과의 경쟁에서 우리는 천연의 항공모함을 확보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두 섬을 지켜낸 인물은 부산 출신의 어부 안용복(安龍福)이다. 안용복은 1658년 생으로 경상좌수영 산하의 능로군(稜櫓軍)으로 복무했다. 338페이지

중세 이후의 세계사는 바다를 활용하는 능력이 각국의 운명을 갈랐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처음에는 동양이 앞서 나갔다. 중국은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시절이던 1406년부터 7차례에 걸쳐 정화가 이끄는 3만 명의 함대로 동남아와 인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대항해의 역사를 썼다. 유럽의 포르투갈이나 스페인보다 먼저 ‘지리상의 발견’에 나선 셈이다. 이때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영락제 사후 중국은 기왕의 해금정책(海禁政策)을 더욱 강화하며 바다를 멀리했다. 그 결과 세계 최선진국, 최강국이던 중국의 국력은 점차 서구에 뒤처지게 된다. 조선조의 해양사도 중국의 복사판이나 다름없다. 350페이지

통제영은 장교와 병사들만 득실대던 군영도시가 아니었다. 울릉도 이남의 동해안에서 서해안 충청도 태안반도에 이르는 삼남 해변을 다스리는 ‘바다의 수도’였고 어업과 상공업 중심지로 번성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서두에서는 통영을 자본주의의 맹아가 일찍 싹을 튼 곳으로 기술하고 있다. 통제영 말기의 시대상을 묘사하고 있는 소설의 제1장 ‘통영’ 부분을 옮겨본다. 358페이지

통영 앞바다에는 대구와 장어, 청어, 숭어, 농어, 전어, 준치, 문어, 조기, 전복, 홍어, 낙지, 해삼이 풍부했고 개펄에서는 다양한 조개류가 수확되었다. 이들 해산물로 요리한 대구찜과 전복죽, 장어국, 각종 횟감, 유곽(대합의 살을 잘게 다지고 양념을 한 뒤 껍데기에 채워 뚜껑을 닫은 뒤 석쇠로 구운 통영 특유의 요리음식) 등은 통영에서 발전시켜 온 고급 해양음식이다. 366페이지

통영시의 뿌리인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적 무게와 현대적 가치를 공감하게 된 독자들에게 한 인물을 소개하고자 한다. 통영 출신으로 1998년 1월, 러시아 연해주에서 출발한 ‘발해 1300호’란 뗏목을 타고 발해-일본 간 동해횡단항로를 확인하는 항해를 하던 중 차가운 바다에서 산화한 고(故) 장철수(張哲洙) 대장이다. 1986년 첫 대학생 독도 동아리인 ‘독도문제연구회’를 만들 정도로 독도와 바다에 미쳤던 사람… 372-373페이지

차례

프롤로그
용(龍)을 닮은 도시, 통영
-통영 고지도(統營 古地圖)
-두룡(頭龍)의 포구
-한국 해양사(海洋史)의 중심 삼도수군통제영

제1장 삼도수군통제사가 뭐길래?
-통영 토성고개의 전설
-인조반정의 승자(勝者) 구인후 통제사
-인조반정의 패자(敗者) 원수신 통제사
-1623년 봄, 통제영의 유혈(流血) 군권교체
-무신들의 로망 삼도수군통제사

제2장 조일전쟁과 수군통제사
-통제영 전사(前史)…‘바다를 버린 나라’ 조선
-해양포기가 초래한 일본의 기습(?)전쟁
-이순신과 한산대첩
-원균과의 갈등, 이순신 통제사에 오르다

제3장 ‘전쟁의 선물’ 삼도수군통제영
-한산도 통제영 시대(1593.8~1597.7)
-모항(母港) 없는 유랑시대(1597.7~1597.10)
-보화도 시대(1597.10~1598.2)
-고금도 통제영 시대(1598.2~1598.11)
-종전 후 최대 논쟁, 해방본영(海防本營)의 위치 선정
-두룡포에 통제영을 건설하다

제4장 통제사, 해상총독으로 군림하다
-해변의 수도(首都)가 된 삼도수군통제영
-‘36,000장졸‧548함대’ 병권(兵權)을 쥐다
-‘해상총독’ 통제사의 권력
통제사의 행정권
통제사의 사법권
통제사의 경제권
-통제사에 대한 처우
-통제사 통제대책

제5장 역대 삼도수군통제사
-누가 통제사가 되었나?
-무장가문(武將家門)의 통제사직 독과점
-실력보다 핏줄?…통제사 혈연도(血緣圖)

제6장 활동량 많았던 초창기 통제사(1593~1662)
-‘원조(元祖) 통제사’ 이순신과 원균
-조일전쟁을 경험한 통제사들
-인조반정으로 운명 바뀐 통제사들
-후금·청(淸)과 관련 깊은 통제사들

제7장 전성기 통제영, 의욕 넘친 통제사(1662~1751)
-실력으로 입신(立身), 실수로 망신(亡身)한 통제사들
-통제사 역임 후 경영대장(京營大將)에 오르다
-통제사 역임 후 경영대장(京營大將)에 오르다
-잦은 환국(換局)…통제사 출신들 명암 교차
-명문가 후예, 잇따라 통제사에 오르다

제8장 원숙기 통제영, 관료화된 통제사(1751~1849)
-영조 시기 균역법‧금주령으로 고생한 통제사들
-숨죽인 무장들…잦은 파직․복직에 ‘파리 목숨’
-‘홍경래의 난’ 이후 문관형 통제사 시대

제9장 통제영 말기시대, 작아진 통제사(1849~1895)
-통제사 위상은 강화, 통제영 군력은 약화
-‘부정부패 시대’…통제영의 근대화 실패
-‘최악의 통제사’ 등장…통제영의 소멸

제10장 통제영 3백년사
-통신사(通信使)와 통제사(統制使)
-남벌론(南伐論)과 통제영
-안용복(安龍福)의 울릉도․독도 회복과 통제영

제11장 통제영, 한국 해양문화의 요람이 되다
-유럽의 해안 거성(巨城)과 조선의 해변 건축물
-통영문학에 담긴 해양지향성
-통영에서 꽃핀 고급 해양문화

에필로그
통제영의 현재적 가치와 장철수의 꿈

부록 한산도선생안(閑山島先生案)
참고문헌

지은이 : 장한식(張漢植)

통영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신문학과(현 언론정보학과), 동(同)대학원을 졸업하고 1991년 KBS 기자로 입사해 사회부와 정치부 등 여러 부서를 거쳤고 베이징특파원을 지냈다. 이어 뉴스제작부장과 경제부장, 사회부장, 해설위원, 편집주간, 전략기획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의 격전지 견내량과 한산도 앞바다가 바라다 보이는 통영시 용남면의 해변마을에서 태어난 저자는 2009년 『이순신 수국(水國) 프로젝트』를 저술하는 등 대한민국 해양사에 깊은 관심을 피력하였다. 그 후속편으로 지금껏 주변부에 머물렀던 통영과 해양의 중요성을 환기하는 차원에서 『바다 지킨 용의 도시 삼도수군통제영』을 썼다. 통영을 찾은 여행객들에게 ‘통영(統營)’이라는 도시명이 탄생한 유래를 소개하고 가볍게 다뤄진 삼도수군통제영의 역사적 중량(重量)을 복원하기 위함이다. 해양문화의 요람이었던 삼도수군통제영과 그곳을 다스린 통제사들이 조선인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재조명할 가치는 충분하다.
저자는 과거에서 미래의 비전을 찾을 수 있다는 견지에서 역사문제에 제법 천착해 왔던 바 1999년 『신라 법흥왕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예였다』를 저술하였다. 2015년에는 ‘나라의 크기로 상하(上下)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며 작은 나라도 꿋꿋한 의지와 실력이 있다면 능히 큰 나라에 맞설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만주족 역사서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를 출간하여 식자층의 주목을 끌었다.


삼도수군통제영

삼도수군통제영

장한식

리에게 잊혀진 ‘해양 DNA’
삼도수군통제영과 통제사, 그리고 통영 이야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남해 포구에 위치한 통영은 지방 도시 이상의 무게를 지녔다. 통영이란 이름의 유래가 된 삼도수군통제영 덕분이다. 수군통제영과 그곳을 다스렸던 통제사들은 조선인의 삶과 조선왕조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서울의 연구자들은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선 후기, 통영에 위치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수행한 시대적 역할과 파급력은 크고도 깊었다. 그랬기에 지금은 한적한 관광도시, 수산도시에 불과한 통영이지만 세상에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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